십자가 - 윤동주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敎會堂) 꼭대기
십자가(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鐘)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幸福)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十字架)가 허락(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 - 직장인 버전

숨가쁘게 달려온 인생인데
지금 회사 공지 한 귀퉁이
정리해고 명단에 걸리었습니다.


A4용지는 저리도 좁은데
어떻게 이름석자 걸릴 수 있을까요?
전화벨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담배한대 물고 서성거리다가,


주저앉은 사나이,
행복한  승진자들처럼
정리해고 명단에 빠질 수 있다면


손바닥 비벼대며
개처럼 버려버린 자존심을
사무실 책상 밑에
조용히 감춰어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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