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전지>
라면을 끓일려고 물을 올리고 스프를 털어 넣었는데, 가스렌지에 불이 붙지 않았다. 그리고 역한 가스 냄새가 내 코를 자극 했다.
레버를 아무리 돌려도 불꽃은 튀지 않았다.
'흐음... 오밤중에 고장이라...'
잠시 생각에 잠겼다. 냄비 속에는 아직 물에 녹지 않은 분말 스프와 건조된 야채들이 둥둥 떠다니고, 뜯겨진 라면 봉투는 허연 면발을 보이며 절규하고 있었다.
입맛은 진작에 사라졌지만 그래도 뜯어 놓은 라면이 아까워 우선 가스렌지에 불을 붙일 방법을 고민 했다.
'그래 불꽃만 튕겨주면 되잖아? 가스가 얼은것도 아니고...'
난 담배에 불을 붙여 가볍게 한모금 빨았다. 치지직하고 담배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불붙은 담배를 가스렌지에 가져다 대고 레버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 내코를 자극하던 가스가 사라지고, 푸르고 따듯한, 익숙한 불꽃이 피어 올랐다. 아직까지 금연하지 않은 내가 대견스러웠다.
물이 끓는 동안 가스렌지를 바라보며 언젠가 봤던 가스렌지의 구조를 떠올렸다.
'점화 플러그가 고장났나?'
점화플러그는 단순한 장치다. 쉽게 고장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그리고 점화 플로그가 고장 났다면 4구 중에 하나만 고장나지 4개가 동시에 고장날리가 없다
보글보글 물이 끓었다. 네등분한 면을 넣고, 냉동실에서 얼려놓은 파 몇 쪽과 냉동만두를 찾아 넣었다.
'점화 플러그 선이 단선 되었나?'
역시 이 부분이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그렇다면 골치아픈 문제다. 가스렌지를 분해해야할지도 모른다.
'아아... 그건 번거로운데...'
난 가능하면 다른 원인을 찾고 싶어 머리를 굴렸다. 더 단순하고 더 간단한 원인....
라면이 끓고 있다. 계란을 깨 넣고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준다. 풀어진 계란이 익어가며 맑던 국물이 진득해 진다.
'점화 플러그? 점화 플러그면 전기가 필요하잖아? 전기? 가스렌지에 전기를 어떻게 공급하지? 발전기라도 달렸나? 그럴리가 없잖아...'
없는 입맛에도 라면 면빨은 후루룩후루룩 잘도 내 식도를 넘어가고 있었다. 뜨거운 국물을 냄비째 들이키며 난 생각의 끈을 이어갔다.
'옛날에 본 구조도에 발전기가 있었나? 건전지? 그걸 본 기억은 없는데....'
자취를 시작한 후 지금까지 끓인 라면의 숫자를 떠올려봤다. 그 긴 시간동안 수백개의 라면을 끓였지만 점화 플러그가 태업한적은 없었다. 가스렌지를 교체한적은 있어도, 건전지를 교체한적은 없었다.
마지막 면발과 김치 한조각을 삼켰다. 따끈한 국물을 한 모금 마시고 냄비를 개수대에 넣었다.
'그래도 건전지를 교체하는게 가장 덜 번거롭겠지?'
난 최대한 덜 번거로운 방법이 고장의 원인이길 기대하며, 건전지가 들어 있을만한 위치를 찾아 봤다.
그 때 가스렌지 위에 붙어 있는 스티커가 눈에 들어 왔다.
"스파크의 발생 주기가 길거나 없을 경우에는 제품 뒷면에 부착된 건전지를 확인해 주세요"
'............'
난 조용히 설거지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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