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처음 접한것은 이희재씨의 작품을 통해서다.

80년대였을게다. 당시에는 '보물섬'이라는 두꺼운 만화잡지가 있었다. 그곳에 실린 이희재씨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처음 접하면서 난 이 작품에 푸욱 빠지고 말았다.

그전에 접한 이희재씨의 작품은 '악동이'였다. 아마도 이 작품은 '소년중앙'이라는 잡지에 실린걸로 기억하는데, 솔직히 난 악동이를 무척 싫어했었다. 좀 짜증스러웠다고 할까? 그래서 2번인가 보고서 악동이는 보지 않게 되었다. 이때의 나의 선입관이 좀더 깊게 작용했다면, 난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도 접하지 못하게 되었을 거다.

우선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는 악동이와 비슷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고, 초반의 전개 조차도 악동이처럼 사고치는 꼬마가 나오는 거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원작을 뛰어넘는 감동이 있었다.

2000년? 아니면 1900년대의 끝자락에서 난 인터넷을 뒤졌다. 그리고 각기 다른 사이트에서 단행본으로 나온 이희재씨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주문했다.

긴시간이 흘렀지만, 그 작품의 제제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제제나 나나 '자기 세계를 즐기는 특별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20대의 끝자락의 나는 그 꿈을 놓지 않을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고, 제제는 여전히 자신의 세계를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제제는 여전히 자신의 세계를 볼줄아는 '뽀르뚜까'라는 친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 안에서 뽀르또까가 세상을 떠나고 제제는 제단 앞에 앉자 울부 짓었다. "왜 어린왕자는 철이 들어야 하나요?"

철이 든다는 것은 '세상과의 타협'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그 울부짓음은 슬프고 슬픈 절규였다.

이제는 서른이 되었고, 몇일만 지나면 서른 하나가 된다.
난, 아직도 놓지 못한 꿈에, 타협하지 못한 고집에 괴로워 하고 있다. 범인이면서도 범인의 삶을 거부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힘들다. 가끔은 울고 싶을 정도로....

거부하고 거부하고 싶은 '송충이론'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잠이 깰때마다. 난 울고 싶다.

오늘 난, 다시 제제를 만났다.

- 마지막 이야기 -

사랑하느 뽀루뚜가 아저씨!
오랜 세월이 흘러 저도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리움 가운데서도 때로는 어린시절이 계속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킵니다.
제게 딱지와 구슬을 주신 분은 당신이었습니다.
전 아이들에게 가끔 딱지와 구슬을 나누어 주곤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인생이란 별로 위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전 어린 시절의 저를 만났습니다.
그 시절 이리들의 그 시절에 저는 몰랐습니다.
먼옛날 깨끗한 마음의 어린왕자가 눈에 눈물을 가득 고여 제단앞에 엎드린채 환상의 세계에게 이렇게 물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만 하나요"

사랑하는 뽀루뚜가!
저도 너무 철이 일찍들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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