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뉴스를 보니, 성 범죄자에게 추적장치를 달고 가석방하는 제도가 처음 실시되었다고 한다.
누군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일일이 모니터링 되는 사회에 살고 싶을까 마는, 2008년 대한민국에 그런 사람들이 생겨났다.
제도 시행 이전부터 사회적으로 이슈가 있었고, 인권의 문제와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할 것이라는 이런저런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이 이슈에 관한 나의 입장은 접어두자, 그 대신에 작품 하나를 추천해 본다.
'사형수 042'
일본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사형제도의 논란의 중심에서 '사형제도 폐지를 전제로 하는 한 실험의 피실험자에 관한 픽션이다.
현 한국 사회에서 성범죄자에게 감시용 장치를 붙여서 관리를 하는 것처럼, 사형수의 뇌에 흥분 할 경우 폭발 할 수 있는 칩을 장치하고, 그를 사회에 내 보내어 그것을 관찰하는 실험을 행한다는 것이 커다란 줄거리다. 그리고 그 실험의 대상에 사형수042번이 선택되었다.
솔직히 난, 이런 강제적 시한부 삶에 대한 '선행의 탈을 쓴 폭력'에 과한 이야기를 싫어 한다. '데드맨 워킹이'이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도 그래서 별로 재미있게 보지 못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에게, 그가 의연하게 세상을 떠나지 못하도록 정작 그들이 관심을 필요로 했을 때는 외면했으면서 정작 관심이 필요 없을 때, 억지로 관심을 우겨 넣으며 삶에 애착을 가지는 순간, 단숨에 그 들를 죽여 버리는…… 이런 영하는 나에겐 하드고어보다 더 잔인하게 다가온다.
'사형수042'역시 그런 류의 작품이라는 것은 부정 할 수 없다. 정말 미칠 것 같이 지루하던 그 때, 우연히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절대로 보지 않았을 작품이다. 그런데 막상 봐보니 조금은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이 자품의 마지막이 어떻게 마무리 될지는 작품의 초반에 이미 서술이 된다.
' 사형수042호 타지마 료헤이는 3년간 바깥세상에서 생활하며 천명이 넘는 사람을 만났으며 서른셋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다만 그의 죽음의 이유는 마지막까지 잘 감춰두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 실험의 관찰자인 시이나 박사에 의해 실험의 시작에서부터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으로 진행된다.
이런 류의 작품의 특징은 언제나 가해자인 '사형수'에게 동정을 유도하는 쪽으로 진행이 된다. 개과천선하는 범죄자와 그를 동정하는 주변의 시선 그리고 모두가 바라지 않는 결론으로 독자로 하여금 눈물을 머금게 만든다.
이 작품 역시 그런 기본 스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이미 극의 초반에서 모든 것을 말해버린 만큼, 독자는 마음의 준비도 이미 단단히 해둔 상태다. 그리고 극의 중심에 있는 '사형수042, 타지마 료헤이' 역시 자신의 숙명에 상당히 담담하게 접근하고 있다.
내가 이 작품에 매료된 것은 이 작품이 사형수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결국은 주변인들에게 더 많은 초점이 맞춰졌다는 점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간은 주변의 환경에 의하여 변화한다. '친구를 잘못 만나 비뚤어진' 우리사회의 문제아들은 어떤 의미에서 피해자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가해자일 수 밖에 없는 환경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비뚤어진 증명이다. 조금 더 과장해서 이야기 하자면, 사형제 폐지를 원하는 사람들 역시, 제도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자신의 주변에서 그런 사람들이 나오지 않도록 사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결국 그들 스스로가 무관심과 방관자의 입장에 서있으면서, 문제가 터지고 난 다음에야 그 문제들을 비판하며 목소리를 높여봐야 결국은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런 공허한 메아리는 종국에는 제3의 피해자를 만들고 말 뿐이니까.
이 작품은 현대사회의 강제적 사회체제인 학교를 배경으로 이런 문제들을 잘 이야기하고 있다.
악의를 행하면서 정의라 믿는 불쌍한 족속들과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인간의 쪽팔린 본성, 지금은 평범한 사람인양 혹은 피해자인양 가면을 쓰고 있지만 미래의 가해자의 입장에 설 철없는 아이들의 모습등, 편견의 공포에 물들어버린 나약한 인간들의 습성등을 격양되지 않게 잘 풀어가고있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초반부터 꾸준하게 이어지는 주인공 료헤이의 감정선이다.
그는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미래를 잘 알고 있었으며, 이 실험이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결국 자신이 죽는 다는 것을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마지막 떠나는 모습에서 조차 그는 미련에 질질 끌려 다니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격정적으로 변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조차 담담했으며, 오히려 그의 죽음에 격양되고 그로 인해 변하는 사람들은 그의 주변에 머물러 있던 이들이다.
결국, 죽음은 당사자가 아닌 주변의 슬픔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처럼……
결국은 사회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는 일에는 충분히 무관심함에도, 남의 불행에는 많은 관심을 가진다.
쌈구경, 불구경이 내일이 아니기에 가능한 것이고, 뒤에서 누군가를 흉보고 이간질 함으로써 자신의 내적 만족을 얻어간다.
비열한 습성이지만, 어쩌겠는가 인간은 그렇게 태어난 것을…… 정작 무관심 해야 할 때 무관심하지 못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것에 무관심 해지는 그런 슬픈 족속인 것을…… 적어도 이 작품을 보면, 오늘 뉴스에 나온 그들이, 우리의 관심의 대상인지 아니면 무관심의 대상인지에 대한 답은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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