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의 리바이어스에 관한 인터넷 자료를 찾아보면, 15소년 표류기와 종종 비교되곤 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생기는 권력의 이동과 인간 내면의 변화에 따른 폭력성의 문제 등을 주목하자면, 15소년 표류기보다는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과 더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파리대왕은 고립된 공간에 10대 초반에서 중반의 아이들만 모여 있을 때, 그들은 자기의 이익(결국 그건 재미라는 조금은 원초적인 이유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을 위해서 폭력 집단이 되어버린다는 이야기가 너무도 리얼하고 강렬하게 그려졌다.

내가 이 책을 읽은 것은 굉장히 오래 전이지만 강렬했던 그때의 감상은 아이들은 순수한 악이다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살아오면서 많은 부분 긍정하게 되고, 바뀌지 않은 나의 원칙 중 하나이다.

혹자는 그것이 아이다움이라고 하지만, 그건 제도의 안에 있을 때, 적어도 그들이 다른 세력(어른)의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억압되어 자신들의 순수한 재미의 추구가 100%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을 해석한 것일 뿐, 제도의 틀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모든 힘을 컨트롤할 권한을 가졌을 때는 상황이 다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으로, 현대 사회에서 그렇게 장기간 그리고 아이들만으로 힘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구성될 수 없다는 반론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현대 사회에는 그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공간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바로 교실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적 현상을 우리는 왕따 , 이지메, 학교 폭력 등으로 표현한다.

물론, 이는 근본적으로 같지는 않다. 만일 두 가지 조건이 완벽하게 만족될 경우, 소수의 지배층과 그들을 따르는 다수의 피지배층, 그리고 핍박의 대상이 되는 또 다른 소수의 무리가 생겨야 한다. 그러나 왕따의 경우 그 사회적 구성이 조금은 왜곡되어 있지만, 전체적인 구성은 크게 다르지 않다.

월리엄 골딩 이후에 이런 폐쇄적인 환경을 소재로 한 창작품은 무수히 많다.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무한의 리바이어스이다.

무한의 리바이어스선라이즈에서 1999년 발표한 작품으로 30 26화로 구성된 TV판 애니메이션이다.

감독은 높은 퀄리티의 리얼리티를 보여준 플라네테스와 GUN X SWORD를 만든 타니구치 고로이다 (물론 무한의 리바이어스가 1999년 작품이고 이외의 작품들이 2000년 이후 작품이기 때문에 제작년도의 앞뒤가 바뀌어버렸지만, 이해를 돕기 위한 배려임을 알려둔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작품은 10대 초,중반의 아이들이 우주에 고립되고 그들만으로 사회가 형성되었을 때, 그 안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이동과 인간 내면의 변화에 따른 폭력성을 그렸다. 틀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인간 문명의 한 축인 제도에서 벗어났을 때, 그 환경이 아무리 첨단을 달리는 서기2225년이라 할지라도 그 안의 구성원은 철저한 원시적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파리대왕에서도 그렇듯이, 리바이어스라는 폐쇄된 공간에 고립된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구조되길 꿈꾼다. 그리고 그 희망은 그들이 그간 몸담고 있던 사회의 룰을 따르는 암묵적인 동의에 이른다.

그 동의에 따라 각자가 맡은 역활에 충실하고,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서 구조요청을 하는 등 그들의 모든 활동은 하나의 문명화된 사회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게 된다. 아니 소수의 집단에서만 가능한 유토피아적인 환경까지도 구성이 된다.

하지만 구조의 희망이라는 살얼음판이 깨진 순간, 문명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그리고 그 제도의 탈을 쓴 문명이 사라진 곳에, 원시적인 폭력이 자리를 잡는다.

, 그 폭력에 기생하는 무리가 생기고, 그들에게 저항하던 소수의 무리도 차차 그 거대 집단에 흡수되어 간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재미있는 것이 있다.

바로 권력의 이동에 따른 폭력성의 변화이다. 편의를 위해서 1 2 3차로 4차로 나눠서 설명을 하겠다.

1차는 그들이 표류하는 직후이다.

이때는 그들은 기존의 제도에 편입될 수 있다는 희망(구조의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질서에 따라 생활한다. 그렇기 때문에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고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특히 이때는 외부의 적(표류원인의 제공자)에 대한 반감으로 내부의 결속력 조차 높아지는 모습을 보인다.)

2차는 무력에 의한 쿠데타다.

몇몇 고위층(?)에 의한 정보의 독점이 있었으며, 이에 대해 불만을 품은 몇몇이 무력으로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리고 독재의 형식을 갖춘 정치 구도가 나타난다. 물론 불만을 품은 세력이 존재하지만, 폭력적 수단과 민중의 대표라는 명분을 갖고 있기에, 이는 집단화된 양상을 보이지 못하고, 결국 그 제도에 순응해 간다.

2차의 권력 이동까지는 비록 1차보다 퇴행했다고 하나, 적어도 사회적 질서는 유지되고 있다.

3차는 기존(1차의 지도층)의 세력이 민중(?)의 봉기를 유도해서 권력을 되찾는 과정이다.

절대적인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이 3차의 시기에는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

그 동안 억압되었던 언론의 자유를 누리는 민중은 여기저기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다수의 힘이 소수를 억누를 수 있음을 깨달은 민중(?)은 작은 사건조차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자주 봉기(?)가 일어난다.

, 그간에 억압되었던 자유를 되찾은 그들은 자율이라는 미명하에 방종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결국 사회의 질서는 무너지고 만다.

4차는 더 큰 폭력의 형태를 지닌 전재군주의 등장이다.

2차와 비교하자면, 적어도 이때는 의사결정에 있어서는 소수의 집단이라고 하나 지배층에 의한 협의를 통하게 되고 그나마 민주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4차는 절대적 황권에 의해서 모든 것이 1인에 의해 결정된다.

이 강력한 폭력은 결국 절대적인 지지를 얻지는 못하지만 절대적인 순종을 얻는다.

사회는 가장 억압된 형태를 취하지만, 질서는 가장 안정된 모습을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1차에서 3차까지는 지배층에 대한 불만에 의해서 권력의 이양되는 주체가 바뀌지만, 4차에서는 지배층이 민중에 대한 불만으로 지배 형태를 바꾸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두 작품 모두 합리적 사고를 강조하는 주인공들을 등장시킨다는 공톰점이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 합리적 사고를 강조하는 두 주인공이 정치제도가 퇴화할수록 환영받지 못하고 자신의 입지가 점점 줄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그의 생각에 동의하는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을 빼고는 어떤 집단에도 편입되지 못하고, 그들 따르는 소수의 무리는 모든 집단(지배층과 그들을 제외한 피지배층)으로부터 배척당한다는 것이다.

이런 디테일하고 섬세한 권력의 이동 과정에 대한 묘사는 파리대왕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처럼 무한의 리바이어스는 서로가 협력하여 이상적인 사회를 구성해 가는 15소년 표류기 보다는 원시적 폭력과 문명의 퇴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파리대왕과 비교되어야 더 어울릴 것이다.

물론 무한의 리바이어스가 이처럼 커다란 권력의 이동을 보여주는 것만은 아니다. 이런 권력의 이동에 따른 문제들은 바로 개개인의 갈등에서 시작하는 경우도 많고, 주변에 포진된 조연 캐릭터만 해도 10명이 넘기 때문에 다양한 심리 묘사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SF라는 장르의 특성상 화려한 볼거리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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