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는 것에 많은 의미를 둔다.
우리가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누군가의 불행한 죽음에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만취에 떡이된 인간의 실수를 '술기운'때문에 그렇다며 커다란 관용을 베풀듯이, 아무리 악한 사람에게도 우리는 그의 죽음에 '예'를 갖춘다.
죽음은 멀리해야 할 것이며 그 어떤것보다도 피해야할 두려움이며, 닥치지 말아야 할 불행이다. 그리고 존중해야 할 슬픔이다.
하지마, 그것이 정말 도덕적으로 바른것일까?
우리는 '삶'에 높은 가치를 두기에, 거기에 종지부를 찍는 '죽음'을 터부시한다.
하지만, 그 높은 가치를 두는 것은 자신의 '삶'일뿐 내 이웃의 '삶'은 아니다. 내 이웃의 '삶' 따위는 무가치하고 무가치한것이 현대의 사회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의 삶에 관심이 없다.
아니, 이기적인 우리는, 악하고 악하고 악한 우리는 '내 이웃의 아픔을 사랑한다'. 그래서 그 이웃의 삶에 손가락질을 할지언정 절대로 그 삶을 동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삶에 관심을 가지는 대상은 내가 그 '사정을 잘 아는 나의 이웃이 아니라' 내가 전혀 모르는 '먼나라의 배고픈 아이들과, 못입는 아이들이다.'
내 이웃의 불행한 삶을 방치하면서, 먼 나라 아이의 한끼 밥값을 챙겨주는 것으로 스스로의 가슴에 스스로 '면죄부'를 발부하며 안도하는 것이 우리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회를 믿지 못했다. 우리를 믿지 못했다.
기사는 말한다. 그들이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하지만, 난 그들이 누구보다 명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죽음앞에서 스스로 수천번 수만번 고민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이 자신의 생명보다 아끼는 아이의 삶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을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 이웃인 우리의 손가락질이 두려웠던 것이다.
이 악한 세상에 자신의 생명같은 아이가, 그 차가운 눈 빛과 그 표독스러운 손가락질에 벌거벗고 노출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삶에 마침표를 찍는 바로 그 순간까지, 자신의 아이의 미래를 걱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혼자 먼길을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이 독하다고?
정말 독한건 우리들이다.
그 남겨진 삶을 감싸주지 못하는 우리들이 독한것이다.
그들을 벼랑끝에 내몰리게 한 우리가 독한것이고, 삶이 남겨진 자들을 믿지 못하게 한 우리가 독한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그렇게 독하게 독하게 살면서 악해진 것이다.
그리고 우리 한명 한명이 구성원인 이 사회가 악해진것이다.
그들을 구하지 못하고, 그 절벽위에서 지르는 비명을 외면했으며, 그 가슴에 안겨진 뜨거운 피를 우리는 차갑운 시선으로 대면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우리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돌아오지 못 할 길을, 그 아이들과 함께 한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머리숙이고 예를 갖춰야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인 것이다.
한 생명이 살아온 시간보다 더 긴, 그들이 살아갈 시간들을 지켜줘야 하는 것이다.
대승이 아닌 소승의 견지에서 먼 이웃의 구원보다는 내 이웃의 한끼 꺼리를 걱정해 줘야 하는 것이다.
미쳐, 그들의 비명을 듣지 못해서 그들의 죽음을 방치 할 수 밖에 없었더라도, 그들이 우리를 믿지 못해서 스스로의 가슴에 비수를 박으며 그들의 영혼까지 죽이는 행위를 막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두번이나 죽이는 그 가슴찢어지는 선택을 고려하지 않을 수 있도록, 그들이 그들의 이웃을 믿을 수 있도록....
우리는 덜 독해져야 하고, 덜 악해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죽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를 고민해야 한다.

http://media.daum.net/society/affair/view.html?cateid=100008&newsid=20090211184809889&p=noc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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