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다수의 논리에 반하는 소수의 논리는 신선해 보인다.
그것이 언변으로 무장한 논리일 경우, 신선함에 플러스 알파가 되어 그것은 진실로 착각 되어 버린다.
김형태가 쓴 글은 바로 그런 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처음 카운셀링을 의뢰한 자칭 이태백(이후 이태백)의 마음은, 힘들 때 누군가 토닥거려 주기를 바라는 어린 마음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힘내세요, 곧 많은 것들이 좋아질 거에요. 등등에 희망이라는 설탕가루가 잔뜩 묻어있는 사탕을 물려주기를 바라는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징징거렸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마도 그가 예상했던 답변은 그런 뻔한 대응이었을 것이다.) 그때 김형태는 울고 싶은 놈의 뺨을 때리고 말았다.
20대들이 정확히 하고 싶은 일이 없고, 확실하게 할 줄 아는 것이 없고,
겁은 많아서 실패는 무진장 두려워 하고, 무엇이든 보상이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으면 절대 시작도 하지 않으며
눈은 높아서 자기가 하는 일도, 주변의 현실들도 모두 못마땅하고, 시시껄렁하고,
옛날 사람들처럼 고생고생하면서 자수성가하는 것은 할 자신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고,
어떡하면 편하고 안정된 직장을 얻어 돈을 벌 수 있을 까만 궁리합니다.
20대가 그런 식이니까 사회가 무기력해지고 경제가 침체되어 불경기가 오는 것이죠.
난 묻고 싶다. 하고 싶은 일이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다라는 이 신랄한 비판은 과연 20대만이 들어야 할 비판인가? 물론, 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것은 본인의 잘못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그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이고 기성세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같은 시간 같은 공부를 하고 같은 목표만을 쥐어주면서 그것을 손에 꽉 쥐지 못한 자는 낙오자 취급하는 이 땅에서 과연 개성은 환영 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 개성을 살리겠다고, 연극에 몰두하는 아이는 결국 자살을 선택해야 했다는 이야기가 비단 먼 땅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 땅의 현실임을 부인할 수 있는가? 연애를 해도 대학에 붙은 후에 하고, 고뇌를 해도 대학을 붙은 후에 해야 하는 이 땅에서, 개성이란 환영 받지 못하는 괴물이고 ‘부모’라는 투구를 쓰고, 제도라는 칼을 든 영웅에게 퇴치되어야 할 괴물일 뿐이다.
개성을 중시하자는 사회적 이슈는 공허한 캐치프레이즈일 뿐이며, 진정 추구해야 할 진실은 명문대이다. 개성은 그곳에 들어간 후에야 그나마 심을 가치가 있는 씨앗으로 인정 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의 생각과 고뇌가 말살되면서 개성은 고사하고 자기 개발이라고는 오로지 교과서와 참고서뿐인 이들에게 무슨 꿈이 있겠는가? 그리고 꿈이 없이 19~20년을 살아온 그들에게 과연 명확하게 하고 싶은 것이 있을 수 있는가? 대학에 합격한 사람들보다 낙방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시절, 대학에 붙은 사람들이 비정상이라고 불렀다. 외팔이의 나라에 가면 정상인이 병신취급을 받는 다고 했던 것처럼, 이 땅에서 20년의 핍박 속에서도 꿈을 가지고 살아온 이들이 특별한 것이다. 꿈이 없고, 하고 싶은 것이 없는 것은, 그들이 살아온 환경을 생각한다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고 대학에 가서 없던 개성이 꽃을 피우고, 꿈의 열매가 열릴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대학은 유치원의 작은 텃밭과 같다. 그 작은 텃밭에 이제 막 씨를 심었을 뿐이다. 이제 이곳에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비료를 주면서 가꿔가야 할 것이다.
대학에 들어간 그들은 유치원생들과 별반 다를 바 없기에, 처음에는 그 텃밭에 심취한다. 하지만 이네 곧 시들해 져서, 다른 흥미거리를 찾거나, 어느새 사회에 나갈 나이가 되어 버린다. 이때, 그들이 텃밭으로부터 관심을 잃지 않게 도와줘야 하는 것이 바로 사회와 기성의 몫이다.
하지만 사회는 어떤가? 대학만 들어가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그들을 배신하고 또다시 취업경쟁에 몰아 넣는다. 도서관과 학원에 그들을 몰아넣고, 그나마 떡잎이 나오던 텃밭을 방치하고 한발 더 나아가 짓밟아 버리기까지 한다.
끝끝내 텃밭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 떡잎을 바라보며 눈망울을 반짝이는 아이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을 지 모르나, 사회와 기성에게는 낙오자의 낙인을 받을 뿐이다. 그러다 가끔 그곳에서 열매를 따온 아이를 추켜세우며 자신들의 죄를 반성하기 보다는 그 아이의 역량이 뛰어남으로 덮어 버리며, 매년 똑 같은 과오를 반복할 따름이다.
이런 교육의 열악함이 백 만년 전부터 지속되어 왔다고 주장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한다면, 역시나 콧방귀 한번 껴주마. 교육이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선배에게, 후배에게, 가족에게, 동내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연에서까지,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교육이다. 지금의 환경은 ‘학교’의 교육만이 교육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학교는 지식을 가르칠지언정, 교육을 베풀고 있지는 않다. 옛날 버릇없는 아이를 탓할 때 쓰던, ‘부모가 뭘 가르친 건지…’라는 말을 하며 혀를 찰 때, 그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적어도 부모님이 아이에게 뭔가 전해줄 시간은 있었단 말이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이 없는 부모는 자식을 통해서 대신 욕을 먹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은 전무하다. 아이가 학교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가, 아이는 가족보다 친구들과 친해져야 한다. 파리대왕에서 보다시피 아이들은 순수한 악이다. 그들이 사회의 사각에 발을 들여놓을 때 그들은 폭력적이 되고, 순수하게 악이 된다. 결국 인성을 쌓을 유일한 사회인 교실은 사회의 사각에 놓이면서 몇몇 집단으로 나눠지고, 이 집단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이익(재미)만을 추구하게 된다. 이때 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는 엄석대의 제물이 되어야 한다. 물론 아버지와 할아버지 시절에도 엄석대는 존재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엄석대가 자신이 속한 유일한 사회는 아니었다. 즉 적어도 그들에게는 엄석대로부터 자유로워질 대안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는 엄석대 만이 유일한 사회가 된다. 탈출구가 없는 이것이 현 교육의 현실인 것이다. 이런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그들은 20대가 되어간다. 그리고 사회에 내던져진다.
20대가 할 줄 아는 것이 없다고 했는가? 그럼 중년의 연륜이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인가? 그들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20대는 이제 막 사회에 던져진, 사회초년생이다. 그들이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4년간 전공을 공부해서 자격증을 따도, 6개월간 학원을 다니다 자격증을 따도, 그들이 사회에 나가서 할 수 있는 일은 비슷하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경험이고 사회에 나와 경험을 쌓아 가면서 연륜이 쌓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런 경험과 연륜을 쌓도록 도와 주는 것이 바로 기성과 사회의 몫인 것이다. 이는 그들의 경험이 없음을 탓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닌가? 이에 관해서는 장황하게 떠들 필요도 없다.
그리고, 눈이 높고, 주변의 모든 것들이 시시껄렁하게 느껴지고 어떻게든 편하고 안정된 직장을 얻어서 돈 벌 궁리만 한다고 했는데? 그 외에 20대들이 배운 것이 무엇인가?
공부를 잘 하라는 것도, 좋은 대학을 가라는 것도, 좋은 직장을 얻으라는 것도 결국은 돈을 좀더 잘 벌기 위한 수단들이 아니었던가? 그들에게 우리가 그렇게 세뇌를 시켜놓고서 이제 와서 그들이 아는 것이 그것뿐이라고 질타하는 것은, 자신이 바담풍이라 하면서 제자가 바담품이라고 한다 하여 매질을 하는 훈장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하루아침에 무너졌지만, 그것은 그간에 저질러온 비리와 쌓이고 쌓인 무게를 못 이겨 무너진 것이다. 이 땅의 경제가 이렇게 무너진 것은, 그런 어처구니 없는 사고 방식으로 살아 온 것으로도 모자라, 그렇게 가리키고 있는 무책임함이 쌓이고 쌓여 그 무게를 지탱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을 무시하고, 그들의 의욕 없음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기성의 또 다른 기만이며, 무책임함일 뿐이다. 참으로 치졸한 변명이다.
취업문이 좁다고들 난리지만, 사실 모든 회사에서는 새로운 인재가 없어서 난리입니다. 세상은 자꾸 변해가고 경제구조도 바뀌어가니까 새로운 젊은 인재들이 회사에 들어와서 젊은 피를 수혈해줘야 하는데 이력서를 디미는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개성도 없고 창의력도 없고 일에 대한 열정도 없이 그저 돈만 바라보고 온 사람들입니다. 회사입장에서 볼 때 그런 사람들은 조금만 더 나은 봉급을 주는 직장이 나타나면 미련없이 회사를 그만둘 사람들로 보이고, 또 그들이 기대하는 젊은 혈기와 창의력도 없이 누구나 학원 좀 다니면 딸 수 있는 뻔한 자격증만 잔뜩 가지고 오죠.
그래서 요즘 회사들은 신입사원 최우선 기준이 '충성도'랍니다.
이력서를 디미는 젊은이들이 하나같이 개성도 없고, 창의력도 없다고?
그래, 나도 그들에게 그런 것이 부족하다는 것은 위에서 말했으니, 그렇다고 치자!
그럼, 그들의 개성과 창의력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력서를 디미는 이들의 90%는 면담 한번 못하고, 서류심사만으로 떨어진다. 이렇게 떨어진 사람 중에 90%는 그나마 창의력과 개성이 묻어나는 자기소개서는 무용 지물이 되고, 이력서가 통과한 10%의 사람만이 그나마 자기소개서가 한번쯤 누군가에게 읽혀졌다는 사실에 안도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은 아무런 개성도 나타나지 않는, 모든 것을 전투력으로 환산할 수 있는 학벌과, 학점, 그리고 나이와 성별로 그 개성과 창의성이 평가 받아 진다는 것이다.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부터, 혹은 유치원 때부터, 오로지 공부만을 위해서 살아오면서, 그렇게 기성과 사회가 만족하는 전투력을 길러 결국 사회가 원하는 인재상이 된 10%만이 그나마 면접을 볼 때, 메카라 빔을 쏘면서 자신의 시력을 과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부가 그 회사에 합격을 할 것이다. 그것이 과연 창의력과 개성을 평가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 그렇게 스카우터를 날려버릴 전투력만으로 뭉쳐진 그들에게 충성심이라는 것이 있을 것인가?
아까도 이야기 한 것처럼, 그들이 추구해온 학벌과 학점은 더 많은 돈을 더 쉽게 벌기 위한수 단이었을 뿐이기에, 더 많은 돈을 준다는 곳으로 그들이 떠나갔다고 해서, 그들을 탓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이것도 한발쯤 양보해서 탓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럼 그들에게 충성심을 요구하는 회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방만한 경영과 찬란한 비리로 회사가 위태로우면, 자신의 살을 베고 뼈를 깎아 가면서 경영을 정상화 시키려 하기보다는, 그렇게 개처럼 충성해온 사원의 목부터 짤라 버리는 회사가 아닌가? 자신의 희생과 헌신은 없으면서, 다른 이의 맹목적인 충성만을 요구하는 그들이 과연 더 많은 돈을 따라 흘러가는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죄 없다 할 수 없기에 차마 돌을 던지지는 못하겠다.
자, 이제 자신을 뒤돌아 보자,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해 보기 바란다. 자신이 20대라면, 지금 이순간 이태백과 같은 꿈을 꾸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자신이 20대를 넘었다면, 자신의 가슴 한 켠에 그 당시에 고이 접어야만 했던 그런 꿈이 없는지를... 아마도 십중팔구는 그런 꿈을 꾸고 있거나, 그렇게 고이 접어 놓은 빛 바랜 꿈을 발견할 것이다.
나 역시도 그러했고, 20대에 자신의 미래에 관한 두려움과,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아니 그런 고뇌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 사회가 망하지 않고 그나마 유지해 갈수 있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뇌 속에서 박종철씨와 같은 열사가 태어난 것이고, 그런 행동이 태어난 것이다.
행동하라는 의견에는 찬성이다. 하지만 생각 없는 행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보다 위험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난 고뇌하라고 말하고 싶다. 고뇌하고 고뇌해서 자신 안에서 답을 찾을 때, 결국 행동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절차탁마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있다. 빠르지 않을지라도, 당장 빛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고뇌하고 고뇌하다 보면 결국 언젠가는 빛이 나게 될 것이다.
사회가 이렇게 된 것은 결코 20대의 탓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를 이렇게 만들고, 그들을 그렇게 만든 기성과 사회가 그들에게 속죄를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것이 언변으로 무장한 논리일 경우, 신선함에 플러스 알파가 되어 그것은 진실로 착각 되어 버린다.
김형태가 쓴 글은 바로 그런 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처음 카운셀링을 의뢰한 자칭 이태백(이후 이태백)의 마음은, 힘들 때 누군가 토닥거려 주기를 바라는 어린 마음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힘내세요, 곧 많은 것들이 좋아질 거에요. 등등에 희망이라는 설탕가루가 잔뜩 묻어있는 사탕을 물려주기를 바라는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징징거렸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마도 그가 예상했던 답변은 그런 뻔한 대응이었을 것이다.) 그때 김형태는 울고 싶은 놈의 뺨을 때리고 말았다.
20대들이 정확히 하고 싶은 일이 없고, 확실하게 할 줄 아는 것이 없고,
겁은 많아서 실패는 무진장 두려워 하고, 무엇이든 보상이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으면 절대 시작도 하지 않으며
눈은 높아서 자기가 하는 일도, 주변의 현실들도 모두 못마땅하고, 시시껄렁하고,
옛날 사람들처럼 고생고생하면서 자수성가하는 것은 할 자신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고,
어떡하면 편하고 안정된 직장을 얻어 돈을 벌 수 있을 까만 궁리합니다.
20대가 그런 식이니까 사회가 무기력해지고 경제가 침체되어 불경기가 오는 것이죠.
난 묻고 싶다. 하고 싶은 일이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다라는 이 신랄한 비판은 과연 20대만이 들어야 할 비판인가? 물론, 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것은 본인의 잘못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그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이고 기성세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같은 시간 같은 공부를 하고 같은 목표만을 쥐어주면서 그것을 손에 꽉 쥐지 못한 자는 낙오자 취급하는 이 땅에서 과연 개성은 환영 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 개성을 살리겠다고, 연극에 몰두하는 아이는 결국 자살을 선택해야 했다는 이야기가 비단 먼 땅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 땅의 현실임을 부인할 수 있는가? 연애를 해도 대학에 붙은 후에 하고, 고뇌를 해도 대학을 붙은 후에 해야 하는 이 땅에서, 개성이란 환영 받지 못하는 괴물이고 ‘부모’라는 투구를 쓰고, 제도라는 칼을 든 영웅에게 퇴치되어야 할 괴물일 뿐이다.
개성을 중시하자는 사회적 이슈는 공허한 캐치프레이즈일 뿐이며, 진정 추구해야 할 진실은 명문대이다. 개성은 그곳에 들어간 후에야 그나마 심을 가치가 있는 씨앗으로 인정 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의 생각과 고뇌가 말살되면서 개성은 고사하고 자기 개발이라고는 오로지 교과서와 참고서뿐인 이들에게 무슨 꿈이 있겠는가? 그리고 꿈이 없이 19~20년을 살아온 그들에게 과연 명확하게 하고 싶은 것이 있을 수 있는가? 대학에 합격한 사람들보다 낙방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시절, 대학에 붙은 사람들이 비정상이라고 불렀다. 외팔이의 나라에 가면 정상인이 병신취급을 받는 다고 했던 것처럼, 이 땅에서 20년의 핍박 속에서도 꿈을 가지고 살아온 이들이 특별한 것이다. 꿈이 없고, 하고 싶은 것이 없는 것은, 그들이 살아온 환경을 생각한다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고 대학에 가서 없던 개성이 꽃을 피우고, 꿈의 열매가 열릴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대학은 유치원의 작은 텃밭과 같다. 그 작은 텃밭에 이제 막 씨를 심었을 뿐이다. 이제 이곳에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비료를 주면서 가꿔가야 할 것이다.
대학에 들어간 그들은 유치원생들과 별반 다를 바 없기에, 처음에는 그 텃밭에 심취한다. 하지만 이네 곧 시들해 져서, 다른 흥미거리를 찾거나, 어느새 사회에 나갈 나이가 되어 버린다. 이때, 그들이 텃밭으로부터 관심을 잃지 않게 도와줘야 하는 것이 바로 사회와 기성의 몫이다.
하지만 사회는 어떤가? 대학만 들어가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그들을 배신하고 또다시 취업경쟁에 몰아 넣는다. 도서관과 학원에 그들을 몰아넣고, 그나마 떡잎이 나오던 텃밭을 방치하고 한발 더 나아가 짓밟아 버리기까지 한다.
끝끝내 텃밭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 떡잎을 바라보며 눈망울을 반짝이는 아이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을 지 모르나, 사회와 기성에게는 낙오자의 낙인을 받을 뿐이다. 그러다 가끔 그곳에서 열매를 따온 아이를 추켜세우며 자신들의 죄를 반성하기 보다는 그 아이의 역량이 뛰어남으로 덮어 버리며, 매년 똑 같은 과오를 반복할 따름이다.
이런 교육의 열악함이 백 만년 전부터 지속되어 왔다고 주장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한다면, 역시나 콧방귀 한번 껴주마. 교육이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선배에게, 후배에게, 가족에게, 동내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연에서까지,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교육이다. 지금의 환경은 ‘학교’의 교육만이 교육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학교는 지식을 가르칠지언정, 교육을 베풀고 있지는 않다. 옛날 버릇없는 아이를 탓할 때 쓰던, ‘부모가 뭘 가르친 건지…’라는 말을 하며 혀를 찰 때, 그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적어도 부모님이 아이에게 뭔가 전해줄 시간은 있었단 말이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이 없는 부모는 자식을 통해서 대신 욕을 먹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은 전무하다. 아이가 학교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가, 아이는 가족보다 친구들과 친해져야 한다. 파리대왕에서 보다시피 아이들은 순수한 악이다. 그들이 사회의 사각에 발을 들여놓을 때 그들은 폭력적이 되고, 순수하게 악이 된다. 결국 인성을 쌓을 유일한 사회인 교실은 사회의 사각에 놓이면서 몇몇 집단으로 나눠지고, 이 집단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이익(재미)만을 추구하게 된다. 이때 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는 엄석대의 제물이 되어야 한다. 물론 아버지와 할아버지 시절에도 엄석대는 존재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엄석대가 자신이 속한 유일한 사회는 아니었다. 즉 적어도 그들에게는 엄석대로부터 자유로워질 대안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는 엄석대 만이 유일한 사회가 된다. 탈출구가 없는 이것이 현 교육의 현실인 것이다. 이런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그들은 20대가 되어간다. 그리고 사회에 내던져진다.
20대가 할 줄 아는 것이 없다고 했는가? 그럼 중년의 연륜이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인가? 그들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20대는 이제 막 사회에 던져진, 사회초년생이다. 그들이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4년간 전공을 공부해서 자격증을 따도, 6개월간 학원을 다니다 자격증을 따도, 그들이 사회에 나가서 할 수 있는 일은 비슷하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경험이고 사회에 나와 경험을 쌓아 가면서 연륜이 쌓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런 경험과 연륜을 쌓도록 도와 주는 것이 바로 기성과 사회의 몫인 것이다. 이는 그들의 경험이 없음을 탓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닌가? 이에 관해서는 장황하게 떠들 필요도 없다.
그리고, 눈이 높고, 주변의 모든 것들이 시시껄렁하게 느껴지고 어떻게든 편하고 안정된 직장을 얻어서 돈 벌 궁리만 한다고 했는데? 그 외에 20대들이 배운 것이 무엇인가?
공부를 잘 하라는 것도, 좋은 대학을 가라는 것도, 좋은 직장을 얻으라는 것도 결국은 돈을 좀더 잘 벌기 위한 수단들이 아니었던가? 그들에게 우리가 그렇게 세뇌를 시켜놓고서 이제 와서 그들이 아는 것이 그것뿐이라고 질타하는 것은, 자신이 바담풍이라 하면서 제자가 바담품이라고 한다 하여 매질을 하는 훈장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하루아침에 무너졌지만, 그것은 그간에 저질러온 비리와 쌓이고 쌓인 무게를 못 이겨 무너진 것이다. 이 땅의 경제가 이렇게 무너진 것은, 그런 어처구니 없는 사고 방식으로 살아 온 것으로도 모자라, 그렇게 가리키고 있는 무책임함이 쌓이고 쌓여 그 무게를 지탱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을 무시하고, 그들의 의욕 없음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기성의 또 다른 기만이며, 무책임함일 뿐이다. 참으로 치졸한 변명이다.
취업문이 좁다고들 난리지만, 사실 모든 회사에서는 새로운 인재가 없어서 난리입니다. 세상은 자꾸 변해가고 경제구조도 바뀌어가니까 새로운 젊은 인재들이 회사에 들어와서 젊은 피를 수혈해줘야 하는데 이력서를 디미는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개성도 없고 창의력도 없고 일에 대한 열정도 없이 그저 돈만 바라보고 온 사람들입니다. 회사입장에서 볼 때 그런 사람들은 조금만 더 나은 봉급을 주는 직장이 나타나면 미련없이 회사를 그만둘 사람들로 보이고, 또 그들이 기대하는 젊은 혈기와 창의력도 없이 누구나 학원 좀 다니면 딸 수 있는 뻔한 자격증만 잔뜩 가지고 오죠.
그래서 요즘 회사들은 신입사원 최우선 기준이 '충성도'랍니다.
이력서를 디미는 젊은이들이 하나같이 개성도 없고, 창의력도 없다고?
그래, 나도 그들에게 그런 것이 부족하다는 것은 위에서 말했으니, 그렇다고 치자!
그럼, 그들의 개성과 창의력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력서를 디미는 이들의 90%는 면담 한번 못하고, 서류심사만으로 떨어진다. 이렇게 떨어진 사람 중에 90%는 그나마 창의력과 개성이 묻어나는 자기소개서는 무용 지물이 되고, 이력서가 통과한 10%의 사람만이 그나마 자기소개서가 한번쯤 누군가에게 읽혀졌다는 사실에 안도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은 아무런 개성도 나타나지 않는, 모든 것을 전투력으로 환산할 수 있는 학벌과, 학점, 그리고 나이와 성별로 그 개성과 창의성이 평가 받아 진다는 것이다.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부터, 혹은 유치원 때부터, 오로지 공부만을 위해서 살아오면서, 그렇게 기성과 사회가 만족하는 전투력을 길러 결국 사회가 원하는 인재상이 된 10%만이 그나마 면접을 볼 때, 메카라 빔을 쏘면서 자신의 시력을 과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부가 그 회사에 합격을 할 것이다. 그것이 과연 창의력과 개성을 평가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 그렇게 스카우터를 날려버릴 전투력만으로 뭉쳐진 그들에게 충성심이라는 것이 있을 것인가?
아까도 이야기 한 것처럼, 그들이 추구해온 학벌과 학점은 더 많은 돈을 더 쉽게 벌기 위한수 단이었을 뿐이기에, 더 많은 돈을 준다는 곳으로 그들이 떠나갔다고 해서, 그들을 탓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이것도 한발쯤 양보해서 탓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럼 그들에게 충성심을 요구하는 회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방만한 경영과 찬란한 비리로 회사가 위태로우면, 자신의 살을 베고 뼈를 깎아 가면서 경영을 정상화 시키려 하기보다는, 그렇게 개처럼 충성해온 사원의 목부터 짤라 버리는 회사가 아닌가? 자신의 희생과 헌신은 없으면서, 다른 이의 맹목적인 충성만을 요구하는 그들이 과연 더 많은 돈을 따라 흘러가는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죄 없다 할 수 없기에 차마 돌을 던지지는 못하겠다.
자, 이제 자신을 뒤돌아 보자,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해 보기 바란다. 자신이 20대라면, 지금 이순간 이태백과 같은 꿈을 꾸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자신이 20대를 넘었다면, 자신의 가슴 한 켠에 그 당시에 고이 접어야만 했던 그런 꿈이 없는지를... 아마도 십중팔구는 그런 꿈을 꾸고 있거나, 그렇게 고이 접어 놓은 빛 바랜 꿈을 발견할 것이다.
나 역시도 그러했고, 20대에 자신의 미래에 관한 두려움과,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아니 그런 고뇌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 사회가 망하지 않고 그나마 유지해 갈수 있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뇌 속에서 박종철씨와 같은 열사가 태어난 것이고, 그런 행동이 태어난 것이다.
행동하라는 의견에는 찬성이다. 하지만 생각 없는 행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보다 위험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난 고뇌하라고 말하고 싶다. 고뇌하고 고뇌해서 자신 안에서 답을 찾을 때, 결국 행동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절차탁마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있다. 빠르지 않을지라도, 당장 빛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고뇌하고 고뇌하다 보면 결국 언젠가는 빛이 나게 될 것이다.
사회가 이렇게 된 것은 결코 20대의 탓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를 이렇게 만들고, 그들을 그렇게 만든 기성과 사회가 그들에게 속죄를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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