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국어와 문학교과서의 시를 배우면서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당시의 내가 느끼는 시란 읽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주면 되는 것이었다. 나에게서의 시는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의미도 없었다. 하지만 선생님들께서는 그 시를 연과 행 그리고 문법으로 세세히 해부를 하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의미들을 일일이 들어 보이셨는데, 이는 결국 내가 시에서 그나마 받은 감동조차도 반감시키게 되었다. 이 경험의 영향이었는지, 이후 나는 일부 예술작품들에 대한 가식적인 해석에 항상 냉소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아무런 감동도 주지 않는 예술작품이 단지 그 안에 어떤 거창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인정 받고, 또 그렇게 인정 받기 위해서 자신의 작품에 어떤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작가들을 보며 안쓰러움을 느끼곤 했다. 그 안에 어떤 메시지가 숨어 있건 간에 그것이 감상하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식인들의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물론 예술이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예술은 특정 집단의 문화가 아니라 모든 대중을 위한 문화여야 하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술이 대중을 위해서 존재한다면, 대중이 찾지 못하는 메시지를 숨겨 놓고 자아 도취에 빠지거나 자신의 그림을 높게 평가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사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으로 예술작품들을 감상하던 나는 피카소의 ‘게르니카(Guernica)’를 접한 후에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다. 물론 게르니카 역시도 첫 느낌은 평범하다는 것이었다. 그간 여러 매체를 통해서 보아온 피카소의 그림들보다는 좀 어두운 색체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뿐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접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을 통해서, 나는 게르니카에 숨겨진 사회미술주의(Socialist Realism)를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예술작품 감상에 대한 나의 딜레마가 시작되었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피카소의 게르니카 역시도, 기존의 내 가치로 본다면 역시 허위의식에 가득한 작품일 뿐이었다. 하지만 미술은 사회에 봉사해야 하므로 사회의 부조리와 부패를 폭로하고 윤리를 회복해야 한다는 미술사회주의의 이념은 하나의 충격이었고, 예술에 대한 나의 생각이 얼마나 편협했는지를 알게 된 작은 사건이었다. 그러한 이념을 바탕으로 그려진 작품이라면 비록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감상자가 찾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식자들이, 이러한 배경지식을 갖추지 못한 채 단지 그림을 볼 뿐 그림에 내재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일반 대중을 우매하다고 생각하며, 그 우매한 대중을 깨우치겠다는 시선으로 작성한 듯한 평론들을 보면서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몇년전 보았던 영화 취화선의 ‘오원 장승업’이 시(詩) ·서(書) ·화(畵) 삼절(三絶)과 문자향(文字香)을 강조하며 ‘제발(題跋)이 붙어야만 진정한 그림’이라고 생각했던 조선말 선비들의 예술에 대한 허위의식을 비판한 것과, “뭇 백성이 기댈만한 곳이 아무것도 없음에 진경이 아닌 선경으로 그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면 그 역시도 환쟁이의 천명이 아니겠는가”라던 그의 말과 미술사회주의의 이념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림으로서 표현하는 방법론에서는 분명 차이가 이었다. 피카소를 비롯한 몇몇 미술사회주의 화가들은 그림 안에 메시지를 담고자 노력했고, 장승업은 누구라도 보고 즐거워할 만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노력을 했다. 이 두 차이는, 비록 그 뜻은 같을 지라도 받아 들이는 입장에 서있는 나는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내가 했던 극단적인 비판과 판단은 예술가들에 대한 편협한 사고였음을 스스로 깨달은 것과, 나와 같은 생각으로 그걸 고치고자 노력했던 예술가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만으로도 나에게는 커다란 수확이었지만, 작품 안에 뜻을 알고 나서야 이런 나의 오류를 알게 되었다는 것도 또한 딜레마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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