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정의되어야 할 민.주.주.의의 세가지 힘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삼권이 모인 공권(公權)과 경제를 움직이는 자본(資本) 마지막으로 민주주의(民主主義)라는 한자에 유일하게 들어나는 민중(民衆)이 있다.
어느 날, 난 샤워를 하다가 이 세가지 힘이 가지는 단순한 원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원리는 바로 가위바위보와 이 세가지 힘의 상관관계가 너무도 닮아 있다는 것이다.
가위바위보는 인간이 만든 최고의 균형을 갖춘 게임이다. 세가지 형태 중 어떤 모양도 일방적으로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위는 가위를 이기지만 보를 이길 수 없고, 보는 바위를 이기지만 가위를 이길 수 없다. 물론 가위는 보를 이기지만 바위를 이길 수 없다. 이 단순한 규칙과 균형은 오랜 세월 많은 이들에게 이어져왔으며, 많은 놀이들이 세월의 망각 속에 잊혀져 감에도 불구하고 유구한 세월 속에 다양한 나라에서 즐겨지고 있다.
그럼, 민.주.주.의의 세가자 힘과 가위 바위 보는 어떤 상관관계를 가질까?
우선 위에서 언급한 공권, 즉 권력은 바위다. 그리고 경제를 지탱하는 자본은 가위다. 마지막 민주주의의 핵심이라 불리는 민중은 보가 된다.
그 이유를 지금부터 설명 하겠다.
권력 = 바위
바위 = 권력
가위 바위 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가위의 속성을 가진 자본에게 강하다. 자본이 움직일 수 있는 법을 만들고, 또 자본이 잘못 흐르는 것을 힘으로 차단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물론 정상적으로 작동 할 때의 이야기지만, 이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다.) 하지만 이들은 민중인 보에 약하다. 국민투표라는 (그들이 그렇게도 바꾸고 싶은 그러나 명분이 없어서 바꾸지 못하는) 제도적 장치에 의해 이들에게 권력을 쥐어주는 이들이 바로 민중이기 때문이다.
자본 = 가위
가위 = 자본
즉, 보의 속성을 가진 민중은 가위의 속성을 가진 자본이 자신의 밥줄을 끊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언제나 자본의 눈치를 보게 된다.
또 다른 이유는 자본은 기회주의가 되어 언제나 자신들이 이로운 쪽의 옷자락을 쉽게 잡을 수 있는 박쥐 같은 속성이 있으며, 가위는 세가지 형태 중에서 유일하게 다른 속성의 옷자락을 잡기 쉬운 형태를 취하고 있다. (권력(바위)은 펴진 손가락이 없기 때문에, 민중(보)은 옷자락을 잡는 순간 더 이상 보의 형태를 유지 할 수 없기 때문에)
민중 = 보
보 = 민중
역사적으로 민중의 뜻이 모여 권력을 이긴 사례는 많지만, 뜻을 합치지 못해 확실히 보의 형태를 만들지 못하고, 바위의 속성을 가진 권력에 그들의 뜻이 좌절된 사례들은 그보다 더 많다.
즉, 민중은 손을 완전히 펴야지만 그 힘을 발휘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덜 펴진 손가락에 가위가 되거나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어 힘이 있음에도 힘을 사용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동맹, 혹은 연합 – ‘하나빼기 놀이’
솔직히 이 속성에 대한 분류는 각자가 이상적인 형태로 독립적인 운영이 이루어진다면, 이렇게 글을 쓸 이유가 없다. 문제는 3명 이상이 모이면 언제나 힘의 경쟁이 생겨나고 파벌과 서열을 만들지 못하면 좀이 쑤시는 인간의 슬픈 천성이 있기 대문이다.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이 세가지 힘 역시 그 구성원이 인간이라는 이유로, 이 슬픈 천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위에서 잠시 언급 했듯이, 이 힘의 균형은 가위바위보 놀이만큼이나 완벽한 균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고, 이상일 뿐이다. 이 힘의 논리가 잔인한 현실에 대입될 경우, 몇몇 변수에 의하여 그 균형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해 볼 때, 하나의 속성이 일방적으로 몰릴 때가 있는데, 이를 속성간의 동맹 혹은 연합이라고 하자.
두 속성이 연합해 하나의 속성을 공격할 경우, 가장 큰 장점은 ‘절대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 빼기’놀이에서 볼 수가 있는데, 두 사람이 각각 두 가지 속성의 형태를 내어 놓고, 상대방의 속성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한 속성을 내어 놓으면, 이론적으로는 절대로 질 수가 없다.
예를 들어, 갑은 가위와 보를 가지고 있고, 을은 보와 바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둘 다 보를 내밀면 절대로 질 수가 없다. 이는 어떤 조합을 해도 마찬가지다. 다만 한쪽이 양손에 같은 속성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면, 이는 절대로 이길 수가 없는 놀이가 된다.
즉, 속성간의 동맹 혹은 연합은 한쪽은 양손에 동일한 속성의 형태를 가지고 있고, 다른 쪽은 두 속성을 가지고 게임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단, 이 속성간의 동맹 혹은 연합은 민주주의라는 체제는 물론이고 모든 주의(主義)와 상관없이 성립을 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권력(바위)과 자본(가위)의 동맹, 혹은 연합
자본과 권력의 연합
이런 사례들은 무수히 많은 크고 작은 사례들이 있으며, 이는 역사의 기록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충분히 찾아 볼 수 있는 사례들이 많다.
자본은 더 많은 자본을 모으기 위해 법의 집행을 멈추거나 스스로에게 유리한 법이 만들어지기를 희망하기 때문에 권력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다양한 각도에서 손을 내민다.
권력은 자신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자본력이 필요하고, 이에 따라 자본이 내미는 손을 민중(보의 속성)이 모르게 잡는다.
이런 관계가 형성되면, 양손에 보의 속성만을 가진 민중은 당 할 수 밖에 없다.
바위는 자신이 불리할 때면, 자신이 나서는 대신 가위를 내밀어 민중을 탄압하기 때문이다.
물론, 민중이 완전한 보의 형태를 가지지 못한다면 가위를 내밀 필요도 없이 ‘너는 보가 아닌 가위야’라고 우기며 바위 자신이 나서기도 한다.
이런 연합은 최근 이명박 정부의 ‘촛불시위 후속대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촛불 시위가 한 창일 때는 ‘너희는 보가 아닌 가위다’라고 우기며 물 대포로 진압을 했지만, 결국 보가 완전한 형태를 갖추자 한발 뒤로 물러서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보가 완전한 형태에서 점점 하나 둘씩 손가락을 굽히자, 공권력을 이용해서 다양한 탄압을 시작하고 있다.
그 시위에 참여했던 자동차 부대, 유모차 부대들을 직접 조사해서 민중을 압박하고, 일반 시민들 뿐만이 아니라, 이들이 모여 활동하는 시민 사회단체에는 국보법을 적용하여 갑자기 간첩혐의로 몰아가고 있다. 이런 이념적인 성격이 거의 없는 단체들은 횡령이라는 올가미를 씌워 그들 단체를 지원한 자본(가위 속성)을 압박하여 간접적으로 민중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또, 바위는 자본(가위속성)의 위기감을 앞세워 민중을 압박한다. 이렇게 움츠러든 보는 가위바위보중에서 어떤 형태도 취하지 못하고 놀이에서 제외되어 버린다.
이 경우 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뿐이다. 완전한 형태를 갖추어 뒤에 숨어있는 바위를 전방위로 압박하여, 바위를 이긴 후에 바위가 했던 것처럼, 바위를 이용해 간접적으로 가위를 압박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의 특성상 각각의 손가락에 가해지는 압력에 움츠러든 손가락은 쉽게 펴지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민중(보)과 권력(바위)의 연합, 혹은 동맹
민중과 권력의 연합
이런 연합의 특징은 ‘부의 재 분배과정’에서 많이 나타난다. 구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후의 짧은 기간과, 긴 시간 게릴라 투쟁을 통해 정권을 붕괴시킨 쿠바의 초기 민주주의 혁명 이후의 부의 재분배 과정을 예로 들 수 있다.
쿠바의 경우, 미국의 자본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던 쿠바 내의 정유사들이 혁명정부에 불만을 보이자 정유사들을 모두 국유화 해버린다. 또 농장들을 국유화 하고, 일반 농민에게 나눠 줌으로써 민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기도 했다.
물론, 이 연합의 경우가 모두 이처럼 과격한 현상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자주 화자 되고 있는 미국의 ‘뉴딜정책’은 어쩌면 이 엽합의 가장 성공적인 모습이라고 생각을 한다.
대공황시절 대통령이 된 루즈벨트는 ‘내가 '뉴딜'을 하는 것은 부자들을 더욱 부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려는 것입니다.’라며 미국 최초로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사회보장제도를 만들면서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물론 그를 위한 제원은 ‘자본’즉 가위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는 재취임 연설 중에서 “우리의 전진은 많이 가진 자들의 '부'에 더 많은 '부'를 주는 것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진은 너무 적게 가진 이들에게 우리가 충분히 나누어 줄 수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라는 말은 이런 연합의 형태의 이상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민중(보)과 자본(가위)의 연합, 혹은 동맹
민중과 자본의 연합(?)
민중에게 힘이 있을 때는 선거기간뿐이거나, 아니면 커다란 환란이 있을 때 뿐이다.
그리고 그때도 자본은 미래를 지향(?)해서 언제나 바위의 곁에 있었지, 보의 곁에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예를 찾아야 했기에 여기저기 들쑤셔 본 결과 그나마 비슷한 것을 찾기는 했다.
그건 바로 ‘항일운동’이었다.
당시의 바위는 한국을 합병한 ‘일본’이었고, 민중은 언제나 민중이었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부를 축적했던 ‘보’들이 있었다.
물론, 이때를 ‘민.주.주.의’(노파심에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글은 민.주.주.의라 쓰고 자본주의라 읽어야 한다.)로 본다는 것은 때 늦은 ‘사구체 논쟁’을 다시 불러 일으키는 일이지만, 아무튼 그 때도 자본이 움직인 것은 사실이니까, 일단 민.주.주.의 시대였다고 가정을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그 당시 항일 운동을 지원을 했던 이들이 바로, 가위, 자본이었다.
어떤 이들은 만주의 땅을 사서 한반도를 떠난 이들의 정착지를 제공하였고(윤동주의 생가가 있는 곳이 바로 그런 연유의 땅이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전 재산을 항일운동에 쏟아 부어 가계가 몰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웃긴 건, 해방된 나라에서 그들에게 아무런 보상을 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보상은 나라가 해방되는 것이었고, 그 어떤 명예와 부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그랬다면 또 일부의 자본가들처럼 일본에 붙어 부를 더 늘렸을 것이다. 민.주.주의.사회에서는 자본의 량이 바로 명성의 크기가 되는 시대가 아니던가)
하지만, 더 나가서 해방된 나라에서 정작 큰소리를 치는 것은 바로 그 친일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 이들은 그의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심지어 교육조차 불가능했다. 그런데 친일을 했던 인간들은, 자식들을 일본과 미국에 유학을 보내거나 다양한 고등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 우리는 해방이 되었다.
문제는 우리의 해방이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해방의 또 다른 외세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그 외세와 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항일을 위해서 투신 해온 사람들이나 그의 가족들이 아니라, 친일을 하며 고등교육을 받아서 ‘영어’가 가능했던 사람들이다.
또 웃긴 건, 이 효율을 중시하는 외세는, 나라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을 뽑을 때, 일본의 앞잡이를 해서 경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다시 그 자리에 임명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만행을 감추기에 급급했고, 외세는 효율을 중시한 덕분에 역사는 왜곡되고 오늘날 교과서 문제와 같은 현상을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이 지금 한국의 상위 1%의 자리에 앉아 있고, 국회의원이 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친일의 자식임에도 자신의 부모가 ‘독립운동을 했다’며 역사를 날조하고 자신을 미화 했다.
이래서, 난 국회를 민중에 넣을 수가 없다. 그들의 과거의 행적과 지금의 행적은 언제나 민중의 편이기 보다는 자신들의 부와 자본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아무튼, 이 외에도 역시 혁명정부였던 프랑스 혁명정부와 민중의 연합 혹은 동맹등을 예로 들 수가 있다.
그런데 동맹이 이처럼 과격한 예를 찾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개인적인 생각은 이 체제의 중심에 있는 ‘자본’의 욕심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코 만족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누군가 자신보다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며, 자신들이 스스로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 한 행동을 ‘사회적 헌신’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며(물론 일정정도 기여를 한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 행동에 대한 당연한 보상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 체제에 너무 익숙해진 민중은 이미 ‘노예근성’이 들어 버린 것이다.
민중은 자신들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자신들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잃어 버린다. 그리고 그 무기력과 망각의 중심에는 이 체제가 만들어 놓은 ‘비관론자’와 그들의 무기인 ‘타협’이라는 깡통이 놓여져 있다.
결국 민중은 솥 다리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봉추를 만났음에도 촌구석 면장이나 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 힘의 크기도, 그 위력도 모르고 말이다. 결국 키유닛과 같은 자본은 바위와 연합을 이뤄 자신들의 배를 불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보를 압박할 다양한 수단을 바위에게 제공할 것을 종용하며 민중을 착취하고 있다. 그리고 보는 자신이 가위를 지향하고 있음을 만천하에 알리면서 스스로의 노예근성을 자랑스러워 하며 이렇게 말한다.
‘너도 철 좀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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