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들의 피해의식과 분노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여성이 가해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성 대다수가 분노하는 ‘여성 친화'사회는 지배 계층의 남성이 만든 남성 중심 사회의 ‘부작용’ 혹은 이면이다. - 정희진 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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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리에 똥만 찬 남자인 나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난 마초가 아니다, 그렇다고 페미니스트도 아니다.
뭐 꼭 나의 포지션을 정의해야 한다면, 휴머니스트라고 말하겠지만 그것도 옳은 표현은 아니다. 휴머니즘에 발끝만 담그고 있으니, 마초 꼰대도 혐오하고, 꼴패미니스트도 싫어한다.
아무튼!!.
한국의 여성 혐오가 노골화된 시발점이 언제일까 생각해 봤다.
내 일천한 기억으로는 1999년의 군 가산점 위헌 판결부터라고 생각한다.
그 이전에도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는 있었지만, 지금과 같이 노골적인 혐오는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2000년 이후부터 여성에 대한 혐오가 공공연하게 노골화되기 시작한다.
거기에는 '여성부'와 여성부에 '가족'이 포함된 '여가부'되면서 가속화된 뻘짓이 여성에 대한 혐오를 더욱 부추기게 된다. 이는 '셧다운제'와 같은 게임산업 죽이기 정책을 시행하면서 그 정점을 찍는는데, 여가부의 이름에서 '가족'보다는 '여성'이 더욱 부각되면서 여성에 대한 혐오는 점점 노골화된다.
여기에 '키 180cm 이하의 남자는 루저' '데이트 때 쿠폰을 사용하는 남자는 비호감'이라는 말들이 등장하고, 군대에 대한 토론에서 '군대에서 배우는 게 살인 기술'이라거나 '100일 휴가 받았을 때 공부하면 되잖아요?'라는 식의 몰지각한 말이나 '여자는 군대를 가지 않는 대신 애를 낳는다'는 공감할 수 없는 말들이 쏟아지면서 '김치녀' '된장녀'와 같은 여성을 혐오하는 단어들이 만들어지고 대량 유통된다.
된장녀와 김치녀라는 단어는 크게는 '여성에 대한 혐오'를 담고 있지만, 좀 더 안을 들여다 보면 '권리만 찾고 의무를 거부하는 여성'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2015년 한국이 여성 혐오의 주요한 코드가 바로 그 뜻과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그럼 노골적인 여성 혐오가 시작된 1999년 12월로 다시 가보자.
난 이 시작이 굉장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여성이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한 행동이 누리지 못했던 권리를 쟁취하기 보다는, 남성이 누리던 권리를 박탈하는데 초점이 맞춰진 '하향평준화 정책'이었다고 본다.
군 가산점 위헌 판결은 그런 의미가 굉장히 크다. 솔직히 이 혜택을 받는 남성이 그리 많지도 않았다. 군대를 다녀온 모든 남자가 받는 혜택도 아니었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 중에서도 공무원 시험을 보는 소수의 남자만이 받을 수 있는 아주 미미한(?)한 혜택이었다. (그래서 위헌 판결 이후에 이로 인한 혜택을 본 여성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징성은 크다. '군대'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군복무는 남성에게만 주어진 의무이다. 사회 적응에 가장 중요한 때에, 울며 겨자먹기로 끌려가는 곳이 군대이다. 그리고 거기서 받는 비인간적인 대우들은 그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 그래서 남성에게 군복무의 의무는 '희생'의 의미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렇게 자기 희생을 치렀는데 받을 수 있는 혜택이란 게 꼴랑 '군 가산점'뿐이었던 거다. 물론 거기에 큰 의미를 두는 남성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권리라고 생각했던 그것을 박탈당한 거다.
인간은 누구나 누리던 권리를 박탈당하면 분노한다. 그리고 그 분노는 그 중심에 있는 상징적인 존제에게 향한다. 노무현 정부 때 종부세의 반발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종부세 대상이 아닌 다수의 사람들 조차 미래의 자기 권리가 빼앗긴 듯 분노를 터트렸으니까 말이다.
여기서 남성들은 이 글에서 동의할 수 없다는 '피해의식과 분노'가 생겨난다.
처음에는 군 가산점에서 생겨난 그 피해의식은 점점 세밀한 부분까지 들어가, 데이트 비용, 결혼 시의 집장만 문제까지 들어가기 시작한다.
과거에는 '여성은 약자'라는 이미지가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 문제들이, 여성 조직 단위에서의 평등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객체화된 여성의 행동을 따지기 시작한 거다.
하지만 여성의 평등에 대한 인식이나 목소리가 높아지고, 일부 여성친화적인 법률이 제정된 반면, 사회적 제도와 여성 객체의 의식이 그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고 이는 '피해의식과 분노'를 더욱 키우게 된다. 이는 경제적 불황과 맞물리면서 상승 효과까지 가지고 온다.
내가 아쉬운 건, '군 가산점 위헌 판결'과 관련한 이슈에서 여성단체들이 한발 물러서 있었다면 어떠했을까?라는 거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군 가산점 문제를 법원까지 끌고 간 단체는 여성이 아닌 장애인들이었다. 같은 남자이면서도 장애 때문에 군대를 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가산점을 못 받고 떨어진 장애인들이 '장애인 우선 고용을 주장'했다가 패소한 사건이었다. 뭐 여기서 패소한 이들이 '군 가산점 폐지'소송까지 끌고 간 것이다. 단 이때는 큰 방향을 불러 일으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기에 이화여대에 다니던 여성들이 참여하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페미니스트 단체들이 불을 붙이면서 '군 가산점제도'는 '여성 VS 남성'의 싸움으로 비화된 것이다.
만일 이 때, 페미니스트 단체들이 참여하지 않고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었다면 어떠했을까?라는 가정이 들어가는 것이다. 또, 이후 군 가산점 문제의 토론회에서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의 권리를 옹호하면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으면 어떠했을까라는 또 다른 가정이 들어간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철저하게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주장보다는, 남성의 권리를 빼앗은 사건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들에게 남성은 이해시키고 설득시킬 대상이 아니었다.
양성평등을 외치지만, 그 내용은 울고 싶은 흥부의 뺨을 후려갈긴 놀부 마누라의 심뽀가 보이는 언행들이 많았다. 뺨을 맞고 얼굴에 묻은 밥풀까지 빼앗긴 남성들은 피해의식과 분노에 불타올랐고, 그 불에 여성들은 기름을 뿌렸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여성은 가해자가 아니라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들의 분노에 공감하지 못하고 조소를 날리는 미운 시누이를 자처하고 있다.
이런 미운 시누이 언행이 많아지면, 그 글이 아무리 논리적으로 옳아도 절대 양성평등에 기여할 수 없고, 여성 혐오를 불식시킬 수도 없다. 뭐 글을 쓴 사람에게 자위는 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난 여성운동이 남성이 권리를 빼앗는 게 아니라, 그들이 권리를 지켜주면서 자신의 권리를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전체적인 권리를 상향 평준화시켜야지, 남성의 권리를 빼앗는 하향평준화 전략은 여성들의 권위를 높여주지도 않을뿐더러, 그 저항감만 높여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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