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지나가 버린 유행처럼 들리는 혁신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이 시대를 지배하는 화두다.
보수정당 조차 그 단어를 기치로 내걸 정도로 '혁신'은 시대의 사명 같다.
혁신의 아이콘인 스티브 잡스와 같은 인재를 배출하는 것은 모든 인재 양성소의 목표고, 그런 인재를 뽑는 게 기업의 사명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다.
모두가 소리 높여 혁신을 외치지만, 혁신은 없다.
왜 그럴까? 지향하는 바와 요구하는 바가 틀리기 때문이다.
분명 잡스는 혁신의 아이콘이다.
그는 늘 새로워 보였고, 늘 앞서 가는것 같았다.
하지만 잡스는 앞서 가기는 했지만, 결코 새롭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놓치는 부분이다.
잡스는 새로운 것을 만든 적이 없다.
잡스는 새로운 해석만을 내놓았을 뿐이다.
Think different 슬로건은 그런 잡스의 생각이 응축된 표현이다.
애플 컴퓨터 이전에도 PC는 있었고,
아이폰 이전에도 스마트폰은 있었다.
물론 아이패드 이전에도 스마트 패드는 있었다.
그 익숙함에 잡스는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 내었다.
오타쿠들의 전유물이었던 PC를 대중에게 선보이고
복잡한 컴퓨터 명령어를 마우스와 GUI를 통해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물론 그 모든 걸 잡스나 애플이 만든 건 아니다. 있는 기술을 활용한 것이다.
스마트폰의 필수라고 생각돼던 스타일러스도 버렸다.
그를 위해 그래피티와 같은 입력 수단 역시 과감히 포기했다.
대신 감압식보다 상대적으로 비싼 정전식 터치패드를 선택한다.
앱을 설치하기 위한 복잡한 프로세스도 누구나 쉽게 설치가 가능한 A2A방식으로 채택했다.
스마트 패드?
아이패드 이전의 스마트 패드는 노트북의 대체품이었다.
컴퓨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잡스는 스마트 패드는 뷰어라고 말했다.
사무실 의자가 아닌, 거실의 소파에서 사용하는 기기라고 말했다.
덕분에 많은 기대치가 낮아졌다.
과거에는 스마트 패드로 뭔가를 생산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아이패드 이후에는 스마트 패드로 뭔가를 생산하는 건 특별한 행위가 되었다.
그게 잡스식 혁신이다.
새로운 것은 없지만 새로운 해석으로 새로운 것을 만드는 힘.
Think Different!
난 이처럼 기업의 정체성을 명확히 표현한 슬로건을 본적 없고, 또 슬로건 그대로 활동하는 기업도 본 적이 없다.
그. 런. 데.
한국에서 혁신을 말하며 늘 스티브 잡스를 예로 들지만, 그들이 원하는 혁신은 잡스의 혁신이 아니다.
한국에서 말하는 혁신은 에디슨식의 혁신이다.
에디슨은 늘 새로웠다.
마법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소리의 저장통 축음기를 만들었고,
역시 마법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인공의 태양, 전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사람을 화면 속에 가둬두는 마법의 기기, 촬영기와 영사기도 만들었다.
'매우 발달한 과학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던 아서 클라크의 말은 아마도 에디슨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의 발명은 혁신을 뛰어 넘는 마법이었으니까...
그리고 대한민국이 말하는 혁신은 바로 그 마법이다.
만년 2위인 기업이 1위를 짓밟고 올라설 수 있는 마법.
늘 깨지는 야당이 모든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마법.
옥탑방에서 시작한 스타트업이 대기업을 누르고 글로벌 기업이 될 수 있는 마법.
잡스식 혁신과 에디슨식 마법의 가장 큰차이는 익숙함의 유무이다.
에디슨의 마법은 결코 익숙하지 않다. 늘 새롭다. 경이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잡스식 혁신은 늘 익숙하다. 애플이 발표할 때마다 언론이 외치는 '혁신은 없다'라는 소리도, 바로 그 익숙함에서 나온다.
물론 대중은 마법을 바란다고 착각할 수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과 전혀 새로운 제품, 그리고 또 다른 새로움.
하지만, "사용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모른다. 따라서 시장조사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라던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대중은 새로움을 원하지만, 어떤 새로움을 원하는지 모른다.
그냥 새롭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새로움이 꼭 마법일 필요는 없다.
익숙함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으면 되는 것이다.
물론 의사 결정권자도 그 새로움에 대해서 판단하기는 힘들것이다.
늘 들었던 이야기고, 늘 보던 아이디어다.
거기에 토시 하나 바뀌었다고 해서 그게 새로움이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다.
큰 맘 먹고 PDA를 사놓고 클리핑 프로그램을 깔 줄 몰라서, 혹은 클리핑을 축출할 줄 몰라서 썩어 문드러지던 PDA가, 한번 클릭으로 모든 뉴스에 접근할 수 있는 아이폰이 되면서 대중에게 새로움으로 다가갔다.
Disk copy A: B:를 몰라서 게임을 복사할 때마다 오타쿠 친구를 찾아 다니며 햄버거를 상납하던 사용자가, 클릭 몇 번으로 디스크 복사를 완료하면서 PC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노트북처럼 모든 걸 다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비싼 애물단지로 전락했던 스마트 패드가, 뷰어가 되면서 5억대가 넘게 판매되었다.
새로운 건 없었다.
그냥 새롭게 해석한 익숙한 기기가 있을 뿐이었다.
혁신은 마법도 아니고, 새로운 것도 아니다. 혁신은 익숙함의 새로운 해석일 뿐이다.
그리고 익숙함은 익숙함이다.
어떤 능력자가 하늘에서 떨어져서 새로운 해석을 주는 게 아니다.
바로 조직 내에 있는 사람이 그 익숙함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다.
아무리 능력 있고 새로운 사람이 와도 그는 익숙함을 모르기에 그 익숙함을 새롭게 해석할 수 없다.
신선한 아이디어를 내 놓을 수 는 있겠지만, 그건 익숙함이 새로운 해석이 아닐 수 있다.
내부의 역량을 과소평가하지 마라, 익숙함을 아는 사람만이 그 불편한 익숙함에서 새로운 해석을 내 놓을 수 있다.
그리고 에디슨을 잡스라고 부르는 뻘짓 좀 그만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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